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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안중근평화마라톤 서울서 열려
하얼빈 의거 99주년 기념 大韓國人 혼 가슴에 담고 뛰었다.
 
지완구 기자
▲ 잠원지구  한강시민공원에서 개최된 안중근평화마라톤 대회 무대 © 플러스코리아 지완구 기자

25일 오후 2시 민족혼을 가슴에 담고 행사 2시간 전인 12시경부터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빗속에서도 참가자 1000여명으로 성황을 이루며 ‘제1회 안중근 평화마라톤’을 빛냈다 .
 
이는 의거 100주년, 서거 99주년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아직 유해도 찾지못한 후손들에 대한 안 장군의 눈물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갑작스런 비였다. 하지만 쏟아져 내린 빗속에서도 장군의 혼백을 기리기 위해 1000여명의 마라톤 참가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적 괴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심장에 육혈포로 저격 명중하여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에 알렸던 대한국인大韓國人 청년 안중근의 외침!! 의거 99주년을 기리기 위해 이날 행사가 치러졌다.

안중근 장군은 ‘대한의군참모중장’ ‘대한독립특파대장’의 신분으로 적 괴수를 사살하고 포로로서 대우해 달라는 안 장군의 요구를 묵살한 일제는 그 이듬해 3월 뤼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으나, 그의 동양평화 정신은 지금도 세계인과 우리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의 혼을 이어받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을 수 있는 ‘의사’가 아닌 당시의 신분인 ‘장군’으로 첫 번째 마라톤 대회가 25일 오후 2시 서울 한강시민 공원 잠원 트랙경기장에서 열렸다. 또한 식전 행사로 제2회 안중근장군 정신실천 전국웅변대회가 열렸다.

주최는 안중근청년아카데미와 인터넷 신문인 네이션코리아. 주관은 마라톤 타임즈, 안중근마라톤클. 후원은 국가보훈처, 특별협찬은 민족종단 대순진리회가 하였다.

이 뜻깊은 행사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현재 왕성한 의정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임두성 의원이 대회장을 맡았고 박준영 전라남도 도지사가 명예대회장을 맡았다.

대회장을 맡은 임 의원은 “99년전 동양평화를 위협한 일본을 향한 안중근의 총성은 민족의 혼이며 청년정신의 표상이었다.”며 “안중근 장군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처음 열리는 ‘안중근평화마라톤’은 99년전 대한국인 청년 안중근의 민족 혼을 가슴속에 담고 뛰고 달리는 가슴벅찬 감동의 대회”라고 전제하고,

“30살의 청년 안중근이 일본침략제국의 심장을 향해 쏘아 올린 총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잠자는 중국 대륙을 일깨웠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처 신호탄이었다.”고 평가하고 “내년 3월 22일에 다시 갖게 되는 안중근 장군 하얼빈 독립특파작전 100주년 기념 마라톤 대회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역설했다.

명예대회장인 박준영 전라남도 도지사는 “99년전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 5천년 배달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를 단절시키려는 가중스러운 일본침략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다.”며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하고 나아가 세계 만인의 행복할 권리 옹호를 위한 위대한 평화정신의 실천이었다.”면서 "위대한 정신을 가슴에 담고 참가자 여러분 모두 힘차게 뛰기 바란다“며 안 장군의 의거와 정신을 기렸다.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2006년 5월 국내외 뜻있는 인사 100여명이 모여 창립하였고, 곧바로 의사가 아닌 ‘장군’이란 호칭을 붙이며 안중근웅변대회와 안중근장군동상건립추진 그리고 오늘 장군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안중근평화마라톤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 빗속에서도 강행된 안중근 평화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건각들이 이날 대회장을 맡은 임두성 의원 출발 총소리와 함께 출발선을 힘치게 뛰어나가고 있는 모습.     ©네이션코리아 정도원 기자)
▲완주하고 들어오는 마라토너들     © 정도원 기자


다음은 이해를 돕기 위해 안중근 장군의 생애를 올려 놓는다.
 

▲ 안중근 장군 기념관 내 사진     ©플러스코리아


안중근 장군은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루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초년시절은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계몽운동 및 의병활동을 선두하여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뒤에 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우리역사의 적,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과정은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 장군의 사상은 도마 안중근은 한말 계몽운동 계열의 근대화론에 영향을 받아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 즉 의병활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의 사상을 일면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감옥에 있을 때 집필한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이다. 이 글은 서론 부분만 있지만 그의 사상과 활동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의 세계정세를 약육강식의 풍진시대로서 서양세력이 동양에 뻗쳐오는 시기로 보았다.
 
그러므로 동양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극력 방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보았다. 따라서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양의 동양침략인 러일전쟁 때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내건 일본의 명분은 올바른 것이었으며, 이때 한민족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동양평화의 약속을 깨뜨리고 한국의 국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한국의 원수가 되었으며 이에 한국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 것으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自存)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버린 뒤 서로 독립한 3국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개화의 역(域)으로 진보(進步)하여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글은 당시 일본이 주장하고, 계몽운동자들의 일부가 가지고 있던 서양에 대응하는 동양세력의 단결을 주장하는 동양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된 1905년 이후 대부분의 계몽운동자들이 일제에 대한 투항의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폭력투쟁으로 나아간 것은 안중근 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안중근 장군께서 뤼순 감옥에서 남긴글이다.出典 논어(論語) - 헌문편(憲問篇) 의 글이며,자로(子路)가 인간완성에 대해 묻자 공자가,˝지혜,청렴,무욕,용감,예능을 두루 갖추고 예악(禮樂)으로 교양을 높혀야 한다. 그러나 오늘에는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見利思義],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칠 줄 알고[見危授命], 오랜 약속일지라도 전날의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久要不忘平生之言] 역시 인간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답한 구절이다.
 
도마 안중근 장군은 코리아, 우라! 를 외치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에 여섯발의 총성과 ‘코리아 우라’라는 러시아어 만세소리의 외침이 들린다. 독립투사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 만세 후 체포되어 일본 검찰관에게 취조를 받는 중에 이토의 죽음을 알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는채 총을 쐈다고 실토, 검찰관들을 당황시킨다. 게다가 장전된 총알 일곱발 중 일부러 한발을 남긴 것에 대해 검찰관들은 의구심을 갖았다고 한다.

32세, 조국을 아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토의 죽음을 통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던 그는 시종일관 의연한 모습으로 재판에 임하고 반년 후인 3월 26일 32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가 사형을 당하고 며칠 후, 국가적 원수인 안중근의 집안을 멸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형사들은 그의 9살 어린아들을 독살시킨다. 그 후로 그의 후손이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가 죽은지 백년이 가까워 오는 동안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까지 건실한 가장이자 선각자, 그리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현장에서 체포돼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할 때까지 안중근은 옥중에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를 곁에서 지켜봤던 일본인 간수들조차 안중근을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형장에 올라설 때도 안중근은 흔들림이 없었다.

원본 기사 보기:pluskorea
기사입력: 2008/10/25 [17:44]  최종편집: ⓒ 마라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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